장흥 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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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흥 임씨는 고려 시대 권문세족 가문으로, 조선 시대에는 유림 및 무관/의병 세력으로 활동한 호남의 재지 사족이다. 고려 시대에는 공예태후를 배출하여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고, 3명의 재상과 많은 대신을 배출하며 명문 가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 왕실과의 관계 때문에 초기에 관직 진출에 소극적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국난 시에는 호남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장흥 임씨는 현재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인물을 배출하며 한국 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며,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장흥 임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 헌원씨 후손 설과 한반도 토착 성씨 설이 있으며, 분자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기원을 추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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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임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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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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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표기 | 長興 任氏 |
다른 이름 | 관산 임씨, 구 정안 임씨 |
국가 | 한국 |
관향 | 전라남도 장흥군 |
시조 | 임호(Im Ho) |
집성촌 | 전라남도 보성군 전라남도 순천시 전라남도 장흥군 전라남도 해남군 |
년도 | 2015년 |
인구 | 37,584명 |
주요 인물 |
2. 역사
장흥 임씨는 고려 시대 권문 세족 가문으로 조선 시대에는 유림 및 무관/의병 세력으로 다양한 활동을 한 호남의 재지 사족(在地 士族)이다. 시조인 임호(任顥)는 장흥에 정착했으며, 그의 아들 임의(任懿)는 고려 예종 때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고, 공예왕후의 할아버지이자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이었다.
고려 시대 동안 장흥 임씨는 3명의 재상 (삼중대광 정1품 품계)과 수많은 대신을 배출했으며,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0개의 가문 중 하나였다. 공예왕후는 고려 의종, 고려 명종, 고려 신종 등 3명의 왕의 어머니였다.
고려 왕실과의 관계로 인해 초기 조선 시대에는 관직 진출을 자제했으나, 내부 및 외부 도전이 증가하면서 장군, 시장, 의병 지도자 등으로 활약했다. 예를 들어, 임계영|任啓英한국어은 외침에 맞서 싸웠고, 임희중|任希重한국어은 학교를 설립했다.[1]
조선시대 장흥 임씨들은 명종 때, 당파 싸움으로 인한 을사사화와 잦은 민란, 왜구의 침범 등 국내 정세가 어려워지자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 진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등 국난 시에는 호남 의병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무장투쟁을 한 인물들이 있으며, 한국 전쟁 때는 임충식 등이 활약했다.
장흥 임씨는 임충식 장군, 임상규 전 농림부 장관, 정치인 임종석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을 배출했다.
2. 1.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 장흥 임씨는 왕가와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4] 특히 호남의 호족 세력으로서 현재의 장흥군과 인접 시군 일부에 장흥도호부라는 지명을 부여받았다. 이후 호족 세력으로 지역 발전에 기여하였다. 시중(侍中: 현대의 수상)을 비롯하여 판서·평장사 등 2품직 이상의 재상(宰相)만 10명 이상을 배출하는 등 전라도에서 첫째가는 명문으로 그 위명을 떨쳤다고 한다.[5] 고려시대 지속적으로 국가와 왕권을 보위한 가문으로, 장흥 임씨 세력이 고려의 다양한 권력 교체기에도 국가의 주요 직책에 봉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학술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민족을 사랑하고 청렴을 강조한 가풍과 혼맥에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6]장흥 임씨 2세조인 임의(任懿)는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를 거쳐 상주국(上柱國)[7]에 이르렀고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경(貞敬)이다. 임의의 아들 원후(元厚)는 시중에 올라 묘청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상주국으로 정안공(定安公)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었다. 원후의 두 형제 원숙(元淑)과 원순(元順)은 각각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들 모두가 출세하였다.
이름 | 관직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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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극충 | 사공(司空),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 고려 문종 때 문과 급제, 한림학사(翰林學士) 역임 |
임극정 | 호부상서(戶部尙書) | |
임유 |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태자태사(太子太師) | 고려 인종의 비 공예태후의 아버지 |
학덕이 높은 명신으로 희종묘(僖宗廟)에 배향된 양숙공(良淑公) 임유(任濡)의 아들 임경숙(任景肅)은 형부상서(刑部尙書)·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에 이어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는데 그가 수찬관(修撰官)으로 있을 때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였다. 임유의 증손 임익(任翊)은 밀직부사(密直副使)·동수국사(同修國史)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는데 왕명을 받들어 선원록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족보편찬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박식다문하고 전고(典故)에 밝아 당시의 수찬관 김련(金聯)과 함께 원나라에 초빙되어 원나라의 세조사적(世祖事績)을 편찬하였다. 원준(元濬)의 증손 임방부(任邦富)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아우 임방수(邦壽)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렀다.
이름 | 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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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任懿) |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상주국(上柱國)[7], 좌리공신(佐理功臣), 정안군(定安君), 시호 정경(貞敬) |
임원후(任元厚) | 시중, 좌리공신(佐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위(守太尉)·상주국, 정안공(定安公) |
임원숙(任元淑) | 평장사(平章事) |
임원순(任元順) | 평장사(平章事) |
임극충(任克忠) |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
임극정(任克正) | 호부상서(戶部尙書) |
임충빈(任忠贇) | 전중감(殿重監) |
임박(任薄) | 이부시랑(吏部侍郞), 이부상서·한림학사(吏部尙書翰林學士) 추증 |
임유(任濡) |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수태부·문하시랑평장사(守太傅門下侍郞平章事), 수태위·주국(守太尉·柱國), 시호 양숙(良淑) |
임항(任沆) | 예부시랑(禮部侍郞) |
임부(任溥) | 이부시랑, 예빈주부, 합문지후,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추증[10] |
임종일(任從一)[11] | 평장사(平章事) |
임익돈(任益惇) | 삼사사(三司使) |
임익순(任益淳) |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겸삼사사(兼三司使) |
임경숙(任景肅) | 동중서문하평장사·수문전대학사·판이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 |
임경겸(任景謙) | 공부상서(工部尙書) |
임효순(任孝順) | 판도판서(判圖判書) |
임경순(任景恂) |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
임찬(任儧) | 문하성사(門下省事) |
임익(任翊) |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
임급(任伋) | 광정대부(匡靖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판삼사사(判三司事)·문하좌찬성사(門下左贊成事) |
임방부(任邦富) | 평장사(平章事) |
임방수(任邦壽) | 태자태부(太子太傅) |
임서원(任瑞原) | 전공판서(典工判書) |
임홍헌(任洪憲) | 태자태부(太子太傅) |
임인정(任仁貞) | 호부상서(戶部尙書) |
임보(任寶) | 예빈시랑(禮賓侍郞) |
임영령(任永齡) | 동지공거[12] |
임서종(任瑞宗) | 순성보조개국원종공신(純誠輔祚開國原從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
2. 1. 1. 왕실과의 인척 관계
고려 인종의 왕비 공예왕후는 임원후의 딸이었다.[4] 공예왕후로 인해 왕실과 인연을 맺어 18대 고려 의종, 19대 고려 명종, 20대 고려 신종은 모두 장흥 임씨의 외손이었다. 이들은 전후 약 50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이 기간 동안 장흥 임씨는 고려 귀족 가문의 발판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5][6]2. 2. 조선 시대
조선 초기에 장흥 임씨들은 관계(官界)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고려 멸망 후 약 200년이 지난 명종 때, 당파 싸움으로 인한 을사사화와 잦은 민란, 왜구의 침범 등 국내 정세가 어려워지자, 장흥 임씨들은 하나둘씩 관계에 진출하여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도 관직을 멀리하는 등 여전히 중앙 진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등 국난 시에는 호남 의병장으로 활동하는 등 관군과 의병으로 활약하였다.조선 초기에는 유(濡)의 5세손 서종(瑞宗)이 예조판서, 서원(瑞原)이 전공판서, 서종(瑞宗)의 아들 헌(獻)은 대사헌, 손자 종선(從善)이 전라감사 등을 역임했을 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벼슬길을 멀리해 오다가 성종 때 원준(元濬)의 8세손 득창(得昌)이 온성도호부사가 된 이래 관직이 이어졌으나, 고려 시대에 비해 크게 번성하지는 못하였다. 득창(得昌)은 당대 제일의 무장으로 불렸으며, 그의 아들 광세(光世)는 좌통례, 동생 충세(忠世)는 병조참판을 지냈다.
광세는 5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희준(希駿)은 절제사, 차남 희순(希馴)은 옥과현감을 지냈다. 3남 희중(希重)은 호가 국담(菊潭)으로, 문장이 뛰어난 석학이었으며 지리와 병서에도 능통했다. 그는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에 사숙(私塾)을 지어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희중의 아들 임계영은 문과에 급제하여 진보현감을 지낸 후 임진왜란을 당하자 전라좌도의병장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해남 의병장 희진(希璡)은 효자 근(謹)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의병장 김천일과 함께 순절하였다.
명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응룡(應龍)은 제주에서 돌아올 때 해송(海松) 여덟 그루를 가지고 나와 제천시 북쪽 경치 좋은 곳에 심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탁사정 유원지로 발전하여 많은 관광객과 피서객이 찾고 있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국난 시에 무장으로 활약한 인물들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국지적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한 인물들이 있으며, 한국 전쟁 때는 제18연대장으로 이후 합참의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임충식 등의 인물이 있다.
- '''임헌'''(任獻)
조선 태조 때 사마시를 거쳐 1399년(정종 1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참판, 대사헌,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 '''임약'''(任約)
조선 때 첨절제사를 지냈다.
- '''임종선'''(任從善)
1419년(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된 후 사간,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가선대부에 올랐다. 전라도, 경상도의 관찰사, 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문(時文)에 능하였다.
- '''임정'''(任挺)
조선 때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 '''임석명'''(任錫命)
조선 때 부호군(오위에 둔 종4품 서반 무관직)을 지냈다.
- '''임규'''(任揆)
조선 때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 '''임중경'''(任仲卿)
조선 때 현감을 지냈다.
- '''임회'''(任會)
조선 때 판관(종5품 벼슬)을 지냈다.
- '''임득창'''(任得昌)
조선 성종 때 사마시를 거쳐 무과에 장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통정대부에 올랐다. 온성도호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고, 청렴결백했다. 성종 때 "당대 제일 무장"으로 칭송되었다.[1]
- '''임광세'''(任光世)
자는 현숙(顯叔), 조선 성종 때 음보(蔭補)로 충순위를 거쳐 통례원좌통례에 이르렀다. 손자 임발영의 공으로 형조판서에 추증, 관산군에 추봉되었다.
- '''임충세'''(任忠世)
자는 신숙(信叔), 조선 때 부사맹(오위에 딸린 종8품)을 지냈다.
- '''임은'''(任誾)
자는 석공(碩公), 호는 죽담(竹潭), 1472년(성종 3년) 성균관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 후진교육에 힘썼다. 경사(經史)에 밝았다.
- '''임근'''(任謹)
자는 경중(敬仲), 호는 백헌(柏軒), 조선 중종 때 효행으로 관찰사의 추천을 받아 강릉참봉을 지냈다. 왕이 특별히 제관(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였다. 왕명으로 홍문관 응교(정4품 벼슬) 조홍진(趙弘鎭)이 왕이 하사한 제문(祭文)과 비문(碑文)을 짓고, 현감 박민헌(朴敏獻) 등이 함께 치제하였다.
- '''임희준'''(任希駿)
자는 덕기(德驥), 호는 백담(伯潭), 조선 때 첨절제사를 지냈다.
- '''임희훈'''(任希訓)
자는 덕일(德馹), 호는 송담(松潭), 조선 때 현감을 지냈다.
- '''임희중'''(任希重)
자는 대수(大受), 호는 국담(菊潭), 조선 명종 때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임억령과는 막역한 사이로서 누차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다가 잠시 좌통례를 지냈다.
후진교육과 학문연구에 전념했고, 저서 『인재책(人才策)』은 유명하다. 경서에 밝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천문, 지리, 병법, 수학 등에도 정통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많은 일화가 전한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임희보'''(任希普)
자는 거규(巨奎). 호는 연담(蓮潭), 조선 때 만호(종4품 무관직)를 지냈다.
- '''임희성'''(任希聖)
자는 중현(仲賢), 호는 난실(蘭室),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내외직을 거쳐 진도군수를 지냈다.
아들 임발영의 공으로 호조판서, 좌찬성에 추증, 관흥군에 추봉되었다.
- '''임희진'''(任希璡)
자는 사현(士賢), 호는 국암(國巖), 조선 선조 때 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 등과 함께 전사했다.
- '''임희사'''(任希駟)
자는 치원(致元), 조선 때 주부를 지냈다.
- '''임응룡'''(任應龍)
자는 희운(希雲), 1556년(명종 11년) 무과에 급제하여 장흥·이산·경원 3읍(邑)을 다스린 뒤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제주목사로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 '''임천감'''(任千鑑)
자는 경택(景澤), 조선 때 판관(종5품 벼슬)을 지냈다.
- '''임준'''(任俊)
자는 경흡(景洽), 1561년(명종 16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종4품 품계)·수문장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용만에 이르러 왜적을 만나 싸우다 형 천감(千監)과 함께 전사했다.
- '''임경백'''(任慶伯)
자는 자한(子翰), 조선 때 훈련원부장을 지냈다.
- '''임숙견'''(任叔堅)
조선 때 현령(동반 종5품 외관직)을 지냈다.
- '''임만영'''(任萬英)
자는 홍백(弘伯), 조선 때 진사를 지냈다.
- '''임천영'''(任千英)
자는 홍로(弘老), 조선 때 첨지중추를 지냈다.
- '''임백영'''(任百英)
자는 홍언(弘彦), 호는 화동(花洞), 조선 때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다.
1561년(명종 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좌승지, 경연관, 수찬관 등을 거쳐 통정대부(문관 정3품 당상관)에 오르고, 김해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익복, 박광전 및 동생 임계영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것을 협의하였다. 연로하여 직접 전장에 임할 수 없으므로 동생 임계영에게 의병장을 위임하고 전략을 지시하는 한편, 가재를 풀어 군량을 보급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문장과 병략에 뛰어났다.
- '''임계영'''(任啓英)
조선의 문신. 자는 홍보(弘甫), 호는 삼도(三島), 157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진보 현감을 지냈으며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해 큰 공을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주변 선비들과 10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남원에서 최경회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고 전라좌도의병장이 되었다. 전라좌도 의병장으로서 근왕의병을 이끌고 경상도 지역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장수 거창 합천 성주 개령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했고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부장인 장윤에게 의병 300명을 나누어 관군을 지원하게 했다. 고성과 거제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해 큰 전과를 거두었다. 화의가 성립된 후 양주 목사 등을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사후 병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가 추증되었다.
- '''임발영'''(任發英)
조선의 무신. 희성(希聖)의 아들로 1568년(선조 1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무예를 연마, 추천을 받아 선전관이 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종묘서령으로서 묘주(廟主)를 모시고 왕을 의주에 호종했다.
의주에서 무과에 급제, 안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운량사로 군량수송에 공을 세웠다.
1604년 호성공신 3등으로 예양군에 추봉,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임중진'''(任仲眞)
자는 거위(去僞), 호는 귀암(龜巖), 어려서부터 문학과 무예에 뛰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달량(達梁)의 난에 적을 격파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경상좌도수군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 '''임계진'''(任季眞)
자는 전여(銓汝), 조선 때 사과(오위에 속한 정6품의 무관직)를 지냈다.
- '''임정'''(任廷)
자는 여필(汝弼), 조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감찰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우수사 이억기를 따라 안골포 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한산도 대첩에서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했다.
- '''임달영'''(任達英)
조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찰방(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을 지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의병 수백을 거느리고 소사, 전주, 금산 등지에서 적을 격파했다. 군자감판관에 올랐다.
- '''임혼'''(任混)
자는 극초(極初), 조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판관으로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 이복남을 따라 용성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고 이복남과 함께 전사했다.
- '''임제'''(任濟)
자는 제부(濟夫), 조선 때 군자감정을 지냈다.
- '''임충간'''(任忠幹, ? ~ 1644년(인조 22년)
조선의 무신. 탁영(卓英)의 아들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묘령이 된 숙부(叔父)를 따라 묘주(廟主)를 모셨고, 1600년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고을의 현령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임금을 남한산성에 호종(扈從), 이듬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고, 가의대부에 올라 여러 지방의 목사를 거쳐 도총부부총관에 이르렀다.
- '''임희'''(任喜)
자는 경숙(慶叔), 호는 이계(怡溪),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제자백가에도 정통했다. 학행으로 추천되어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이재가 그의 행장(行狀)을 짓고, 유림에서 보성에 오현사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 '''임시윤'''(任時尹)
자는 화수(華叟), 호는 거곡(巨谷), 조선 때 통덕랑을 지냈다.
- '''임즙'''(任楫)
자는 경득(景得), 호는 제천당(濟川堂), 조선 때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 부모상을 당했을 때 예절에 따라 상례를 치르니 효행과 학문이 당세에 저명하였다.
- '''임대년'''(任大年)
자는 수경(壽卿), 호는 대은암(大隱庵),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빈곤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흉년을 만날 때마다 돈과 곡식으로 구휼했으며, 전장(田庄)까지 팔아서 제민(濟民)에 힘썼다. 숙종 때 이단하의 추천으로 백의로서 찰방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했다.
- '''임대유'''(任大有)
호는 이암(耳巖), 1607년(선조 40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634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군무에 종사했다.
- '''임대진'''(任大晋)
호는 국사재(國士齋), 조선의 학자이다.
- '''임려'''(任侶)
자는 중성(仲盛), 조선 때 현감을 지냈다.
- '''임만기'''(任萬紀)
자는 예겸(禮謙), 1665년(현종 6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숙종 때 오위장, 양덕현감, 영암군수, 장흥부사, 위도첨절제사, 전라남도우후, 순천·나주의 영장, 평양중군, 숙천부사 등을 역임했다.
관직에 있는 동안 명관으로 이름났으며, 청렴결백하여 명성이 높았다.
- '''임자당'''(任子堂)
자는 세구(世構), 호는 보연(寶燕), 조선 때 학자이다.
- '''임재당'''(任再堂)
보성 출신으로 임재당 선생의 일기인 갑진록(甲辰錄)은 현존 최장의 도망시(悼亡詩)로, 페미니즘 등 다양한 시각에서 인문학적 연구주제가 되었다. 갑진록은 자식이 없이 떠난 풍산 홍씨 부인을 생각하며 쓴 일기로, 유교적 틀안에서의 조선 선비의 부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선생은 부인이 떠나고 얼마되지 않아서 세상을 마감하였으며, 큰 형님의 셋째를 양자로 삼았다. 양자는 이후 무과에 합격했고, 손자는 과거에 급제해 정6품 이조좌랑에 올랐다.[13] 갑진록과 관련해서는 2017년에 개최된 '임재당 도망시 학술대회' 등의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 '''임성'''(任誠)
자는 여현(汝賢), 조선 때 첨절제사를 지냈다.
- '''임이열'''(任以說)
조선 때 판관을 역임하였다.
- '''임홍주'''(任弘舟)
자는 의중(毅仲), 조선 때 학자이다.
- '''임상주'''(任相舟)
호는 강수헌(強睡軒), 1673년(현종 14년)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경서에 능했다.
- '''임후창'''(任後昌)
자는 무백(茂伯), 조선 때 군수를 지냈다.
- '''임수창'''(任壽昌)
조선 때 군수를 지냈다.
- '''임최'''(任最)
자는 유선(惟善), 조선 때 부사를 지냈다.
- '''임욱'''(任勗)
자는 군보(君輔), 조선 때 부사를 지냈다.
- '''임경관'''(任鏡觀)
자는 광보(光甫), 1725년(영조 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사헌부 정4품 벼슬), 사성(성균관 종3품 벼슬) 등을 거쳐 옥구현감, 울진현령, 서산군수, 진주목사, 장흥도호부사 등을 역임하고, 대사성(성균관의 으뜸 벼슬로 정3품)에 이르렀다.
여러 지방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포상으로 은마(銀馬)를 하사받았다.
- '''임재대'''(任載大)
자는 여후(汝厚), 조선 때 부호군(오위에 둔 종4품 서반 무관직)을 지냈다.
- '''임주원'''(任柱元)
자는 대재(大哉), 호는 낙은재(樂隱齋), 1735년(영조 11년) 진사가 되고, 1762년 반궁(泮宮)에 있을 때 송준길, 송시열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케 했고, 박남계를 문묘에 종사하지 말 것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학문과 절의로써 명성이 높았다.
- '''임장원'''(任長源)
자는 회일(會一), 호는 규암(葵庵), 1773년(영조 4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청환직을 거쳐 1798년(정조 22년)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왕으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동부승지에 특진되어 경연관, 춘추관의 수찬관을 겸임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에 뛰어났다. 성품이 충직하여 정조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유학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예조참판,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
- '''임일원'''(任一源)
자는 효여(孝汝), 1754년(영조 3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서, 설서를 거쳐 이조정랑, 장례원정 등을 역임하고, 영해도호부사, 함경도도사, 좌통례, 경성도호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 '''임제원'''(任濟遠)
자는 군즙(君楫), 호는 수암(叟巖), 1755년(영조 31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 감찰을 거쳐 병조, 예조, 호조의 정랑, 장령, 봉상시정, 돈령부도정 등을 역임하고, 만경현령, 양산군수를 지냈다. 청렴결백하여 인망을 얻었고, 문장에 뛰어났다.
- '''임용재'''(任龍材)
자는 인용(仁用), 호는 만회(晩悔), 1831년(순조 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오위장에 특임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838년(헌종 4년) 80세에 이르러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라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 '''임사국'''(任思國)
자는 성보(聖甫), 호는 뢰옹(懶翁), 조선 때 학행이 뛰어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 '''임중현'''(任中鉉)
자는 윤화(允和), 호는 초운(樵雲), 1894년(고종 31년) 성균관진사가 되었다. 학문과 효행으로 명성이 높았고, 평생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김윤식이 그의 행장(行狀)을, 김복한이 초운당기(樵雲堂記)를, 박기양이 그의 묘갈명을 각각 지었다.
- '''임태주'''(任泰柱)
호는 성재(誠齋), 고향인 화순에서 일생동안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그는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당시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추앙되었다.
많은 저서를 남겼고, 장흥의 용강사, 능주의 칠송서원에 제향되었다.
- '''임귀현'''(任龜鉉)
자는 성구(聖求), 호는 전은(田隱), 효행이 뛰어나 고종 때 천거되어 돈령부도정을 지냈고,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임기남'''(任琪南)
자는 응수(應叟), 호는 의재(毅齋), 한말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를 지냈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수성대장이 되어 동학군과 격전 끝에 박헌양 등과 함께 전사했다.
- '''임병관'''(任炳琯)
자는 문초(文初), 호는 죽파(竹坡),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을 지냈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혁명 때 아버지 임기남이 전사하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때 그의 부인 박씨(朴氏)가 뒤따라 적진에 뛰어 들어가 시아버지 시체는 들것에 싣고, 부상당한 남편은 등에 업고 적군을 헤치고 집에 돌아왔다.
일문(一門)의 3절(三節; 忠·孝·烈)로서 칭송을 받았다.
- '''임정현(任淨鉉)'''
1874년-1908년, 한말 의병장, 일명 준현(準鉉), 보성 출신으로 병서를 즐겨읽고 천문과 술수에도 능하였다. 1908년 안규홍이 보성 동소산에서 의거하자 이에 가담하여 파청, 대원 ,운월, 서봉, 진산 등지에서 승전하였다. 병치에서 격전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1990년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 '''임병국'''(任柄國)
자는 민호(珉鎬), 1905년(광무 9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을 회복하고자 수백 장정을 규합하여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고 안규홍, 염재보, 송기휴, 양동훈, 이관회 등과 합세, 1908년 3월 26일 왜적 영호(永戶, えいと)·평정부대(平井部隊, ひらい ぶたい)가 순천으로부터 보성에 출동한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길목에 잠복하였다가 기습하여 대장 영호(永戶, えいと)와 평정(平井, ひらい)을 비롯하여, 많은 왜적을 죽이고 전리품을 노획하는 등 대첩을 거두었다.
문덕·복내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며 왜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나 중과부적
2. 3. 대한민국
;임충식(任忠植)육군사관학교 1기로 임관하여 6·25 전쟁 때 백골부대(18연대장·대령)를 이끌고 많은 전투에서 용명을 떨쳤다. 원산탈환작전 등 140회 이상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대한민국 전사에 신화를 남겼다.[1]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미국 은성훈장 등 36개의 국내외 훈장을 받았다.[1] 제2사단장, 제7사단장, 제5군단장, 제6군단장, 제2훈련소장, 헌병사령관, 국방부차관보, 육군참모차장을 거쳤다. 지휘관으로 있는 동안 부하를 처벌한 일이 없어 덕장으로 존경받았다.[1] 제10대 합동참모의장(대장), 제17대 국방부 장관, 제8·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1]
;임상규(任祥奎)
제17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기획예산처 예산실장, 제21대 과학기술부 차관, 초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제11대 국무조정실장, 제56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순천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행정학 박사 학위가 있다.
;임갑인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1960년), 서울제1변호사회 회장(1976년)을 역임했다.
;임동백(任東伯)
순천시의회 시의원을 역임했다.
;임종문(任鍾汶)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정부 사무관으로 임용되었다. 초대 율촌산단개발사업소장, 도청이전사업본부장, 경제자유구역청 행정개발본부장 및 투자유치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전남대학교에서 토목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개발 관료로 평가받았다.
3. 주요 인물
고려의 문신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의 추천으로 정8품 관료가 되었고, 1095년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서 요나라에 가서 숙종의 즉위를 알리고 귀국했다.[14] 1109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동북면병마사겸행영병마사가 되어 여진에게 함경도의 9성을 돌려주려 했으나 실패했다.
고려의 문신으로,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었으며, 114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정안후(定安侯)에 봉해졌다.[7]
- 임원숙(任元淑)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고려 예종 때 예부상서 등을 역임하고, 인종 때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1116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중서령(中書令) 등에 이르렀으며, 정안공(定安公)에 봉해졌다.
- 임극충(任克忠)
고려의 문신으로, 공예태후의 오빠이며, 1170년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 임극정(任克正)
고려 때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 임충빈(任忠贇)
고려 명종 때 전중감(殿重監) 3품직에 올랐다. 묘지석[15]이 발견되었다.
- 임박(任薄)
고려의 문신으로, 공예태후의 동생이며,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 공예태후 임씨
고려의 학자로, 1197년 중서시랑평장사, 1200년 수태부·문하시랑평장사, 1211년 최충헌의 명으로 한남공 정(貞; 康宗)을 추대하여 즉위케 했다.
- 임항(任沆)
어려서부터 문학에 능했고 덕망이 높았다.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예부시랑에 이르렀다.
- 임부(任溥)
고려의 문신으로 이부시랑, 예빈주부, 합문지후 등을 역임하였다.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추증되었다.[10]
고려 문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 임익돈(任益惇)
고종 때는 병부원외랑, 전중시어사·시어사·낭중·전중소감·시랑, 조의대부 시대부경, 통의대부 판예빈성사, 삼사사 등을 지냈다. 묘지명[16]이 발견되어 수장되어 있다.
고려의 문신으로, 1224년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가 되고 이듬해 겸삼사사(兼三司使)에 임명되었다.
- 임경숙(任景肅)
고려의 학자로, 1227년 수찬관으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 임경겸(任景謙)
고려 때 공부상서를 지냈다.
- 임효순(任孝順) 또는 임효명(任孝明)
고려 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하였다.
- 임경순(任景恂)
고려 때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지냈다.
- 임찬(任儧)
고려 때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지냈다.
고려의 문신으로, 1279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대사성(大司成)·판합문사(判閤門事), 밀직부사·동수국사(密直副使同修國史)에 이어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치사했다.
- 임급(任伋)
1368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뒤에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랐으며, 이부상서(吏部尙書)·판삼사사(判三司事)·문하좌찬성사(門下左贊成事)에 이르러 치사했다.
- 임방부(任邦富)
고려 때 평장사를 지냈다.
- 임방수(任邦壽)
고려 때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지냈다.
- 임서원(任瑞原)
고려 때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역임하였다.
- 임홍헌(任洪憲)
고려 때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지냈다.
- 임인정(任仁貞)
고려 때 호부상서를 지냈다.
- 임보(任寶)
고려 때 예빈시랑(禮賓侍郞)을 지냈다.
- 임영령(任永齡)
고려 때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동지공거가 되어 재사들을 천거하였다.[12]
- 임서종(任瑞宗)
1380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392년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순성보조개국원종공신(純誠輔祚開國原從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고, 뒤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 임헌(任獻)
조선 태조 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399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뒤에 예조참판·대사헌(大司憲)·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 임약(任約)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 임종선(任從善)
1419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된 후 사간·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 임정(任挺)
조선 때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
- 임석명(任錫命)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 임규(任揆)
조선조 때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 임중경(任仲卿)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 임회(任會)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 임득창(任得昌)
조선 성종 때 사마시를 거쳐 무과에 장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뒤에 온성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고, 청렴결백(淸廉潔白)했다. 성종 때 "당대 제일 무장"으로 칭송되었다.
- 임광세(任光世)
자는 현숙(顯叔)이며, 조선 성종 때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거쳐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이르렀다. 뒤에 손자 임발영의 공으로 형조판서에 추증, 관산군(冠山君)에 추봉되었다.
- 임충세(任忠世)
자는 신숙(信叔)이며, 조선 때 부사맹(副司猛)을 지냈다.
- 임은(任誾)
자는 석공(碩公), 호는 죽담(竹潭)이며, 1472년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 후진교육에 힘썼다.
- 임근(任謹)
자는 경중(敬仲), 호는 백헌(柏軒)이며, 조선 중종 때 효행으로 관찰사의 추천을 받아 강릉참봉(江陵參奉)을 지냈다.
- 임희준(任希駿)
자는 덕기(德驥), 호는 백담(伯潭)이며,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 임희훈(任希訓)
자는 덕일(德馹), 호는 송담(松潭)이며,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 임희중(任希重)
자는 대수, 호는 국담(菊潭)이며, 조선 명종 때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고, 임억령과는 막역한 사이로서 누차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다가 잠시 좌통례를 지냈다.
- 임희보(任希普)
자는 거규(巨奎). 호는 연담(蓮潭)이며, 조선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 임희성(任希聖)
자는 중현(仲賢), 호는 난실(蘭室)이며,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내외직을 거쳐 진도군수(珍島郡守)를 지냈다.
- 임희진(任希璡)
자는 사현(士賢), 호는 국암(國巖)이며, 조선 선조 때 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누차 왜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이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 등과 함께 전사했다.
- 임희사(任希駟)
자는 치원(致元)이며,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 임응룡(任應龍)
자는 희운(希雲)이며, 15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장흥·이산·경원 3읍을 다스린 뒤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를 지내고 뒤에 제주목사로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 임천감(任千鑑)
자는 경택(景澤)이며,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 임준(任俊)
자는 경흡(景洽)이며, 1561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수문장(守門將)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용만(龍灣)에 이르러 왜적을 만나 역전 끝에 형 천감(千監)과 함께 전사했다.
- 임경백(任慶伯)
자는 자한(子翰)이며, 조선 때 훈련원부장(訓練院副將)을 지냈다.
- 임숙견(任叔堅)
조선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 임만영(任萬英)
자는 홍백(弘伯)이며, 조선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 임천영(任千英)
자는 홍로(弘老)이며, 조선 때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지냈다.
- 임백영(任百英)
자는 홍언(弘彦), 호는 화동(花洞)이며, 조선 때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눈동자가 둘씩이었다고 한다.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경연관·수찬관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뒤에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 임계영(任啓英)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홍보(弘甫), 호는 삼도(三島)이며, 157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진보(眞寶) 현감을 지냈으며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해 큰 공을 세웠다.
- 임발영(任發英)
조선의 무신으로, 희성(希聖)의 아들로 1568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그 후 무예를 연마, 추천을 받아 선전관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종묘서령으로서 묘주를 모시고 왕을 의주에 호종했다.
- 임중진(任仲眞)
자는 거위(去僞), 호는 귀암(龜巖)이며, 어려서부터 문학과 무예에 뛰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달양(達梁)의 난에 누차 적을 격파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경상좌도수군첨절제사(慶尙左道水軍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 임계진(任季眞)
자는 전여(銓汝)이며, 조선 때 사과(司果)를 지냈다.
- 임정(任廷)
자는 여필(汝弼)이며, 조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우수사 이억기를 따라 안골포 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한산도 대첩에서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했다.
- 임달영(任達英)
조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의병 수백을 거느리고 소사·전주·금산 등지에서 누차 적을 격파했다.
- 임혼(任混)
자는 극초(極初)이며, 조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훈련원판관으로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 이복남을 따라 용성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리고 이복남과 함께 전사했다.
- 임제(任濟)
자는 제부(濟夫)이며,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 임충간(任忠幹, ? ~ 1644년(인조 22년)
조선의 무신으로, 탁영(卓英)의 아들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묘령이 된 숙부를 따라 묘주를 모셨고, 1600년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고을의 현령을 지냈다.
- 임희(任喜)
자는 경숙(慶叔), 호는 이계(怡溪)이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심,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제자백가에도 정통했다. 학행으로 추천되어 벼슬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 임시윤(任時尹)
자는 화수(華叟), 호는 거곡(巨谷)이며,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 임즙(任楫)
자는 경득(景得), 호는 제천당(濟川堂)이며, 조선 때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 부모상을 당했을 때 예절에 따라 상례를 치르니 효행과 학문이 당세에 저명하였다.
- 임대년(任大年)
자는 수경(壽卿), 호는 대은암(大隱庵)이며, 평소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여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 임대유(任大有)
호는 이암(耳巖)이며, 1607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63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군무에 종사했다.
- 임대진(任大晋)
호는 국사재(國士齋)이며, 조선의 학자이다.
- 임려(任侶)
자는 중성(仲盛)이며,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 임만기(任萬紀)
자는 예겸(禮謙)이며, 1665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숙종 때 오위장·양덕현감·영암군수·장흥부사·위도첨절제사·전라남도우후, 순천·나주의 영장, 평양중군·숙천부사 등을 역임했다.
- 임자당(任子堂)
자는 세구(世構), 호는 보연(寶燕)이며, 조선 때 학자이다.
- 임재당(任再堂)
보성 출신으로 임재당 선생의 일기인 갑진록(甲辰錄)은 현존 최장의 도망시(悼亡詩)로, 최근 페미니즘 등 다양한 시각에서 인문학적 연구주제가 되었다. 갑진록은 자식이 없이 떠난 풍산 홍씨 부인을 생각하며 쓴 일기로, 유교적 틀안에서의 조선 선비의 부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13]
- 임성(任誠)
자는 여현(汝賢)이며,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 임이열(任以說)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 임홍주(任弘舟)
자는 의중(毅仲)이며, 조선 때 학자이다.
- 임상주(任相舟)
호는 강수헌(強睡軒)이며, 1673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경서에 능했다.
- 임후창(任後昌)
자는 무백(茂伯)이며,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 임수창(任壽昌)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 임최(任最)
자는 유선(惟善)이며,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 임욱(任勗)
자는 군보(君輔)이며,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 임경관(任鏡觀)
자는 광보(光甫)이며, 172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사성 등을 거쳐 옥구현감·울진현령·서산군수·진주목사·장흥도호부사 등을 역임하고,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 임재대(任載大)
자는 여후(汝厚)이며,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 임주원(任柱元)
자는 대재(大哉), 호는 낙은재(樂隱齋)이며, 1735년 진사가 되고, 1762년 반궁(泮宮)에 있을 때 송준길·송시열을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케 했다.
- 임장원(任長源)
자는 회일(會一), 호는 규암(葵庵)이며, 177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청환직을 거쳐 1798년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왕으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동부승지에 특진되어 경연관·춘추관의 수찬관을 겸임했다.
- 임일원(任一源)
자는 효여(孝汝)이며, 175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서·설서를 거쳐 이조정랑·장례원정 등을 역임하고, 뒤에 영해도호부사·함경도도사·좌통례·경성도호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 임제원(任濟遠)
자는 군즙(君楫), 호는 수암(叟巖)이며, 1755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을 거쳐 병조·예조·호조의 정랑, 장령·봉상시정·돈령부도정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만경현령·양산군수를 지냈다.
- 임용재(任龍材)
자는 인용(仁用), 호는 만회(晩悔)이며, 18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오위장(五衛將)에 특임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 임사국(任思國)
자는 성보(聖甫), 호는 뢰옹(懶翁)이며, 조선 때 학행이 뛰어나 누차 도천되어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 임중현(任中鉉)
자는 윤화(允和), 호는 초운(樵雲)이며, 1894년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학문과 효행으로 명성이 높았고, 평생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에만 전심했다.
- 임태주(任泰柱)
호는 성재(誠齋)이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심하여 고향인 화순(和順)에서 일생동안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 임귀현(任龜鉉)
자는 성구(聖求), 호는 전은(田隱)이며, 효행이 뛰어나 고종 때 누차 천거되어 돈령부도정을 지냈고,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임기남(任琪南)
자는 응수(應叟), 호는 의재(毅齋)이며, 한말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수성대장(守成大將)이 되어 동학군과 격전 끝에 박헌양 등과 함께 전사했다.
- 임병관(任炳琯)
자는 문초(文初), 호는 죽파(竹坡)이며,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을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아버지 임기남(任琪南)이 전사하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 임정현(任淨鉉)
1874년 ~ 1908년, 한말 의병장으로, 일명 준현(準鉉)이다. 1908년 안규홍(安圭洪)이 보성 동소산에서 의거하자 이에 가담하여 여러 곳에서 승전하였다. 병치에서 격전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 임병국(任柄國)
자는 민호(珉鎬)이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을 회복코자 수백 장정을 규합하여 거의할 것을 결의하고 안규홍·염재보·송기휴·양동훈·이관회 등과 합세, 1908년 3월 26일 왜적 영호(永戶)·평정부대(平井部隊)가 순천으로부터 보성에 출동한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길목에 잠복하였다가 기습하여 대장 영호(永戶)와 평정(平井)을 비롯하여, 많은 왜적을 죽이고 전리품을 노획하는 등 대첩을 거두었다.
육사 1기로 임관하여 6·25 동란 때 유명한 백골부대(18연대장·대령)를 이끌고 탁월한 전략전술과 투철한 책임감으로 많은 전투에서 용명을 떨쳤다. 제10대 합동참모의장(대장)을 지냈고 정치인으로서 제17대 국방부 장관과 제8·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17회 행정고시로 임용되어 대한민국 공무원으로 기획예산처 예산실장, 제21대 과학기술부 차관, 초대 과학기술혁신본부 본부장, 제11대 국무조정실장, 제56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 임갑인
고등검사장(대전,1960년) 서울제1변호사회장(1976년)
- 임동백(任東伯)
순천시의회 시의원 역임.
- 임종문(任鍾汶)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임관. 중앙정부 사무관으로 임용. 초대 율촌산단개발사업소장, 도청이전사업본부장, 경제자유구역청 행정개발본부장 및 투자유치본부장 등을 역임. 전남대 토목공학박사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정통 개발관료로 불렸다.
- '''군:''' 임형백(공군준장)
- '''변호사:''' 임종모, 임원배, 임태선, 임통일 등
- '''사법부:''' 임성규(판사), 임한흠(판사) 등
- '''시민단체:''' 임종희(任鍾熙, 일제징용보상위원회)
- '''입법부(국회의원):''' 임영득(任煐得)
- '''입법부(지방의회):''' 임종기(순천시의회 의장, 전남 도의원)
- '''행정부(지방자치단체):''' 임병택(시흥시장), 임영태(군수)
- '''학계:''' 임문석(성균관전학), 임병순(보성향교전교), 임선준(고흥교육장), 임을규(한양대교수), 임정모(농림부연수원교수), 임정배(목포해양대학장), 임정수(순천향교전교), 임중규(전남대교수), 임진모(전북대교수), 임형일(해양전문대교수), 임희모(한일장신대교수), 임영재(서울대교수)
- '''해외:''' 임근수(컴퓨터과학자), 임병우(미국주립대교수) 등
- '''금융권:''' 임정수(농협손해보험 전남총국장)
4. 분파
장흥 임씨의 분파는 다음과 같다.
파조 | 파명 |
---|---|
임의(任懿) | (임의를 파조로 하는 파) |
임원후 | (임원후를 파조로 하는 파) |
임극충 | (임극충을 파조로 하는 파) |
임극정 | (임극정을 파조로 하는 파) |
임유 | (임유를 파조로 하는 파) |
임경숙 | (임경숙을 파조로 하는 파) |
임익돈 | (임익돈을 파조로 하는 파) |
임찬 | (임찬을 파조로 하는 파) |
임간 | (임간을 파조로 하는 파) |
임환 | (임환을 파조로 하는 파) |
임익 | (임익을 파조로 하는 파) |
임원숙 | (임원숙을 파조로 하는 파) |
임원순(임원준) | (임원순(임원준)을 파조로 하는 파) |
임목 | 봉황동파 |
임경 | 효자동파 |
임응기 | 진주공파 |
임응린 | 원주양주파 |
임응표 | 아산파 |
임응룡 | 제천파 |
임응형 | 보령파 |
임여 | 여주파 |
임희무 | 운곡파 |
임눌 | 청계파 |
임희진 | 국암공파 |
임희찬 | 학산파 |
임희중 | 의곡파, 국담파(菊潭派) |
임희보 | 연담파(蓮潭派) |
임희성 | 난실공파(蘭室公派) |
임대진 | 국사재공파(순천) |
임백진 | 대치파 |
임계진 | 평촌파 |
임익수 | 성자동파 |
임국필 | (임국필을 파조로 하는 파) |
임혼 | 진도맹진파 |
임동영 | 진도고성파 |
- | 광주파, 원주파, 두륜봉파, 초평파, 백담파, 송담파, 진도파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
○석(錫) | 태(泰)○ | ○모(模) | 병(炳)○ | ○규(圭) | 종(鍾)○ | ○수(洙) | 영(榮)○ | ○환(煥) | 교(敎)○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
○탁(鐸) | 한(漢)○ | ○근(根) | 형(炯)○ | ○달(達) | 호(鎬)○ |
5. 세계도 (世系圖)
시조 | 호 |
---|---|
임호(顥) |
2세 | 임의(懿) | ||
---|---|---|---|
3세 | 임원후(元厚) | 임원숙(元淑) | 임원순(元順) |
분파 | 문충공파(文忠公派) | 문숙공파(文肅公派) | 문헌공파(文獻公派) |
장남이 왼쪽이다.
3세 | 임원숙(元淑) | ||||||||
---|---|---|---|---|---|---|---|---|---|
4세 | 임영첨(永瞻) | 임충빈(忠彬) | |||||||
5세 | 임효성(孝成) | 임우(祐) | |||||||
6세 | 임영부(英富) | 임순부(純富) | |||||||
7세 | 임선(璿) | 임구(球) | |||||||
8세 | 임진승(眞承) | 임희(禧) | 임귀검(貴儉) | ||||||
9세 | 임충전(忠牷) | 임좌원(佐元) | |||||||
10세 | 임연(衍) | ||||||||
11세 | 임서규(瑞圭) | ||||||||
12세 | 임근(瑾) | 임눌(訥) | |||||||
13세 | 임희무(希武) | 임희관(希寬) | 임희우(希祐) | 임희로(希老) | 임희경(希慶) | 임희진(希璡) | 임희주(希柱) | 임희벽(希璧) | 임희찬(希瓚) |
분파 | 운곡파(雲谷派) | 청계파(淸溪派) | 예락파(禮樂派) | 지석파(支石派) | 선전관공파(宣傳官公派) | 국암공파(菊巖公派) | 학산파(鶴山派) |
3세 | 임원순(元順) | |||||||||||
---|---|---|---|---|---|---|---|---|---|---|---|---|
4세 | 임윤(潤, 국자감제주(國子監祭酒)) | |||||||||||
5세 | 임정보(貞輔, 찬성사(贊成事)) | |||||||||||
6세 | 임방부(邦富, 평장사(平章事)) | 임방수(邦壽, 이부상서(吏部尙書)) | ||||||||||
7세 | 임보(寶, 절제사(節制使)) | 임영령(永齡, 중랑장(中郞將)) | ||||||||||
8세 | 임약(約) | 임존(存) | 임석(碩) | |||||||||
9세 | 임석명(錫命) | 임석복(錫福) | 임일중(日中) | 임집중(執中) | 임윤중(允中) | 임용(墉) | ||||||
10세 | 임득창(得昌, 부사(府使)) | 임득청(得淸) | 임귀청(貴淸) | 임치원(致遠) | 임가원(可遠) | 임정(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 ||||||
11세 | 임광세(光世) | 임충세(忠世) | 임보세(保世) | 임백손(百孫) | 임세호(世豪) | 임세희(世禧) | 임은(誾) | |||||
12세 | 임희기(希驥) | 임희사(希駟) | 임몽필(夢弼) | 임자숙(自淑) | 임정(挺) | 임희정(希炡) | 임희율(希燏) | 임희현(希賢) | 임희백(希伯) | 임희보(希普) | ||
13세 | 임대진(大晋) | 임백진(伯眞) | 임계진(季眞) | 임익수(益壽) | 임국필(國弼) | 임혼(混) | 임동영(東英) | 임중영(仲英) | 임남영(南英) | 임장영(長英) | 임경영(慶英) | 임검영(儉英) |
분파 | 국사재공파(國士齋公派, 순천 이거) | 대치파(大峙派) | 평촌파(坪村派) | 성자동파(成子洞派) | 진도맹진파(珍島孟津派) | 진도고성파(珍島古城派) | 진도세방파(珍島世芳派) |
장흥 임씨의 시조인 임호(任顥)는 장흥에 정착했다. 그의 아들 임의(任懿)는 고려 예종 때 최고위 관직인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공예왕후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또한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의 작위를 받아 오늘날의 장흥군과 보성군, 순천시, 해남군, 고흥군, 강진군 등 인접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다.
고려 시대 동안 장흥 임씨는 3명의 재상 (삼중대광 정1품 품계)과 수많은 대신을 배출했다. 그들은 왕실과 혼인할 수 있도록 허가된 10개의 가문 중 하나였다. 특히, 이 가문의 공예왕후는 고려 의종, 고려 명종, 고려 신종 등 3명의 왕의 어머니였다.
6. 유적
- 삼군사(三君祠):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으며, 임광세(任光世), 임희성(任希聖), 임발영(任發英)을 모시고 있다.
- 운곡사(雲谷祠):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으며, 임근(任謹)을 모시고 있다.
- 오현사(五賢祠):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으며, 임희(任喜)를 모시고 있다.
- 자산재(慈山齋):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으며, 임희중(任希重)을 모시고 있다.
- 용강사(龍岡祠): 전라남도 장흥군에 있으며, 임태주(任泰柱)를 모시고 있다.
- 추원재(追遠齋): 전라남도 장흥군에 있으며, 임희준(任希駿)을 모시고 있다.
- 칠송서원(七松書院):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으며, 임태주(任泰柱)를 모시고 있다.
- 정안사(定安祠):[17] 전라남도 장흥군에 있다.
- 청화루(淸和樓):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에 있다.
- 회고정(懷古亭):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에 있다.
- 임의 묘지명[14]
- 임충빈 묘지명[15]
- 임익돈 묘지명[16]
7. 집성촌
지역 |
---|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학선리 |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 |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은덕리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일대 |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입석리 |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용반리 |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고죽리 |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이동리 |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귀산리 |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신월리 |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 |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일대리 |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비월리 |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운평리 |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대안리 |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신리 |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 용강리 |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봉황리 |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강절리 |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당산리 |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덕정리 |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남치리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옥현리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
8. 인구
연도 | 장흥 임씨 | 관산 임씨 | 합계 |
---|---|---|---|
1985년 | 34,141명 | 1,157명 | 35,298명 |
2000년 | 24,523명 | 1,461명 | 25,984명 |
2015년 | 32,198명 | 5,386명 | 37,584명 |
9. 기원
장흥 임씨는 고려 시대 권문세족 가문으로, 조선 시대에는 유림 및 무관/의병 세력으로 다양한 활동을 한 호남의 재지 사족(在地 士族)이다.
고려 시대에는 왕가와 혼인할 수 있는 가문[4]으로, 특히 호남의 호족 세력으로서 현재의 장흥군과 인접 시군 일부에 장흥도호부라는 지명을 부여받게 하였다. 이후 호족 세력으로 지역 발전에 기여하였다. 시중(侍中: 현대의 수상)을 비롯하여 판서·평장사 등 2품직 이상의 재상(宰相)만 10명 이상을 배출하는 등 전라도에서 첫째가는 명문으로 그 위명을 떨쳤다고 한다.[5] 고려시대 지속적으로 국가와 왕권을 보위한 가문으로, 장흥 임씨 세력이 고려의 다양한 권력 교체기에도 국가의 주요 직책에 봉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학술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민족을 사랑하고 청렴을 강조한 가풍과 혼맥에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6]
장흥 임씨는 고려의 재상 반열에 오른 2세조 임의(任懿)와 그의 아들들인 원숙, 원후, 그리고 원순(또는 원준)을 그 기원으로 모시고 있다. 장흥 임씨의 사당인 정안사(定安祠)에서는 공예태후(恭睿太后)까지 추가로 모시고 있다.
2세조 정경공 이전에 장흥 임씨의 상고에 대해서는 헌원 임씨와의 관계를 고증하려 한 시도와 한반도 토착 성씨로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즉 여러 가지 이견이 있어서 고고학적 고증과 과학적 정립이 필요하다.
장흥 임씨의 시조인 임호(任顥)는 장흥에 정착했다. 그의 아들 임의(任懿)는 고려 예종 때 최고위 관직인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공예왕후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또한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의 작위를 받아 오늘날의 장흥군, 보성군, 순천시, 해남군, 고흥군, 강진군 등 인접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다.
고려 시대 동안 장흥 임씨는 3명의 재상 (삼중대광 정1품 품계)과 수많은 대신을 배출했다. 그들은 왕실과 혼인할 수 있도록 허가된 10개의 가문 중 하나였다. 특히, 이 가문의 공예왕후는 고려 의종, 고려 명종, 고려 신종 등 3명의 왕의 어머니였다.
9. 1. 헌원계설
1979년 7월 중화민국에서 발간한 《임성본원휘고(任姓本源彙考)》에서는 중국 헌원 임씨의 호(顥, 109세)가 장흥 임씨의 시조와 동일인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이견이 있어 확실한 정립이 필요하다. 장흥 임씨의 원조는 도교의 시조이자 중국의 건국 신화에 나타나는 제왕으로,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군주이자 문명의 창시자로 숭배되고 있는 헌원씨로 알려져 있다.[19] 헌원은 유웅국(有熊國) 군주인 소전의 아들 또는 자손이며, 유웅국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곰족(단군신화의 곰을 연상해 볼 수 있다)이 세운 나라이다. 중화민국 임씨종친회에서 발간한 《임성본원휘고》에는 헌원씨의 8자인 우양(禹陽)이 임씨(任氏)로 사성(賜姓)되어 헌원계(軒轅系) 임씨의 시조로 인정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19]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가설이 있다. 송나라 소흥부의 호(顥)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전(銓)이고 둘째 아들(季子)은 관(瓘)이었다. 중국 임씨 세계표에는 계자인 관이 '귀하남불명(歸河南不明: 황하강 남쪽으로 돌아가 생사를 모른다)'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시조 호(顥)가 종통을 이을 장자는 중국에 남겨두고 계자인 관(瓘)을 데리고 고려국으로 왔으며, 고려에 입국하면서 관(瓘)이 의(懿)로 개명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유웅국군 | 소전(少典) |
---|---|
중국시조 | 황제헌원(黃帝軒轅) |
헌원계 1세 | 우양(禹陽, 8자), 창의(昌意), 보(寶), 용묘(龍苗), 청양(靑陽), 휘(暉), 이팽(夷彭), 창림(濸林) |
헌원계 2세 | 우호(禹號), 중양(仲陽) 외 23자 |
헌원계 3세 | 우경(禹京) |
헌원계 4세 | 요양(徭梁) |
헌원계 5세 | 번우(番禹) |
헌원계 6세 | 해우(奚禹) |
헌원계 7세 | 해중(奚仲) |
... (중략) | |
헌원계 100세 | 이(梨) |
헌원계 101세 | 경(燝), 욱(煜) |
헌원계 102세 | 관(雚), 양(壤) |
헌원계 103세 | 염삼(念三), 염구(念九) |
헌원계 104세 | 정방(廷芳), 익(益) |
헌원계 105세 | 성(誠), 혜(譓) |
헌원계 106세 | 수(壽), 원지(元之) |
헌원계 107세 | 약(鑰, 紹興始祖 절강성 소흥부 자계현 소흥시조) |
헌원계 108세 | 충(种) |
헌원계 109세 | 호(顥, 東來韓國始祖 長興任氏遠祖 추정) |
헌원계 110세 | 전(銓), 관(瓘, 歸河南) |
정옹(定翁), 연옹(延翁) |
정경공 묘지명이 발견되어 자세히 검토한 결과, '顥’가 바로 정경공의 부친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두 분은 부자지간(父子之間)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역대 장흥임씨 족보에서 원조(遠祖)라 부르던 분의 휘자(諱字)는 '灝’였는데, 정경공 묘지명에서는 '顥’ 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대만에서 입수한 전기 《임성본원휘고》에서도 중국 소흥임씨의 시조인 임약의 손자가 '任顥’로 기록되어 있어, 정경공 묘지명에 부친으로 나타난 '顥’와 이름이 일치함이 발견되었다. 묘지명의 연대와 《임성본원휘고》 상의 연대를 추정해 본 결과, 두 연대가 일치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경공 묘지명에 나타난 '顥’와 《임성본원휘고》에 나타나는 '顥’가 일치한다는 결론을 맺었고, 임충빈(任忠贇)의 묘지명과 임익돈의 묘지명에서도 모두 동일하게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하여 장흥 임씨의 기미대동보 때부터 시조공의 휘자(諱字)를 '灝’에서 '顥’로 변경하여 표기하게 된 것이다.
중국 임씨 헌원계 109세 '顥’와 장흥 임씨 시조 '顥’ 선조의 이름이 동명(同名)이라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동일인(同一人)이라는 고증이 안 되어 있다.
9. 2. 한반도 토착 성씨설
장흥 임씨 족보 외의 사료나 유물 상으로는 송나라 도래설이 고증되지 않았다. 도래설에 대한 몇 가지 반론은 다음과 같다.- 정경공의 묘지명에는 '나주 정안현 사람이다'라고 출신지가 명확히 밝혀져 있다.
- 고려사 등의 사료에는 정경공 이전에도 임(任)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고려에 살고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 * 고려사에는 장흥 임씨 2세조 정경공의 행적이 1095년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그 이전에도 임억(1061년), 임술광(1017년) 등 총 6명의 임(任)씨가 활동한 기록이 있다.
- * 삼국시대에도 임(任)씨 성을 사용하는 인물의 기록이 있다. 예를 들어 신라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558 임영리 장군은 이찬 관등으로 신라 진골에 속했다. 임나(任那) 가야 지역 인물들을 당시의 왕이 임생(任生)이라 칭한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 고려사 등에서는 문헌이 확실한 정경공(懿)을 장흥 임씨의 1세조로 하였다.
- * 1979년 장흥 임씨 기미대동보(己未大同譜) 발간 전까지는 장흥 임씨의 시조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 * 역대 족보에서 휘(諱) '호(灝)'가 중국에서 고려 시대에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하여 원조로 삼고 있다.
- 직접적 연관은 없으나 장흥 임씨는 원래 정안 임씨로 불렸는데, 비슷한 시기에 출몰한 정안국과 한자가 같다. 정안국은 발해계 유민이 건국한 나라로 많은 수가 고려에 흡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한반도 고대어에서 임(任) 또는 님은 임금(군주)이나 연인을 뜻하기도 한다.
9. 2. 1. 과학적 고증 (분자인류학)
미국에 거주하는 문헌공파 임대진(任大晋)의 30세 손의 SRY(Sex Determining Region Y)를 유전자 분석한 결과 O-CTS201로 판별되었다.[1] O-CTS201의 하부에는 크게 2가지 세부 분류가 있는데, 하나는 한반도, 만주, 일본 등지에서 주로 검출되는 SK1702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본토에서 주로 검출되는 M159이다.[1] SK1702는 약 6천년 전에 한반도와 만주 지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한반도에서 5%를 상회하는 비율로 나타나는 부계 유전자 하플로 그룹이다.[1] 한국인의 경우 O-CTS201은 99% 이상의 확률로 SK1702로 판별되고 있다.[1]이를 바탕으로 장흥 임씨의 선조는 약 6천년 전에 만주 지방으로 이주하여 삼국시대 초기 또는 그 이전에 남하하여 한반도 남부 지방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1]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토착 성씨 중 하나가 된다.[1] 따라서 향후 세부 분류에 대한 검사와 더 많은 유전자 샘플에 대한 검사가 이루어진다면 장흥 임씨의 기원에 대한 논쟁을 과학적으로 고증할 수 있을 것이다.[1]
10. 어원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임(任)'이라는 글자가 '맡는 것(符, 위임)'이며, 인(人)자를 변으로 두고, 소리는 '임(壬)'이라 한다고 하였다.[20] 현대어에서 '임'이란, 중요한 책임이나 직을 '맡기다' 또는 '맡다'라는 뜻으로, '능하다'와 '믿을만하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임(任)'자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그 문헌상의 기원을 갑골문(甲骨文) 또는 서주금문(西周金文)으로 보는 시각에 따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파생 해석이 존재한다.
- '임(任)'자의 형태가 금문(金文)에 '사람 인(亻)'과 '임금 왕(王)'자를 조합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21] 이후 '왕(王)'자의 가운데 획이 길어진 형태로 진화한 후에 다시 윗 획이 기울어진 형태인 현재의 '임(壬)'자로 변화되었다. 이를 토대로 '임(任)'자의 뜻을 현대와 유사하게 사용한 원문이 금문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임(任)'자의 그 원 뜻을 임금, 지도자 등으로 해석한다.
- '왕(王)'자는 천지인에 해당하는 세 획(三)을 관통(丨)하는, 즉 통달한 사람을 의미한다는 해석(王={三, 丨})과, '공(工)'자 두 개를 위아래로 겹친 모양으로 재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는 해석(王={工, 工})이 상존한다.[22] 즉, 갑골문을 '임(任)'의 어원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갑골문의 '공(工)'자가 능통함, 리더, 지도자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거나 내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용하는 '장인 공(工)'자는 갑골문에서는 '丅+口' 또는 '丅+ㅂ' 자 모양을 띄고 있기 때문에,[25] 갑골문의 '공(工)'자를 현대의 '장인 공(工)'자로 오인하는 착오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어원에 대한 해석과 무관하게, '임(任)'자에 '사람 인(亻)'과 함께 사용된 '임(壬)'자는 북방, 크다, 성대하다, 지도자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아홉번째 천간(天干)에 해당하는 글자이다.
'임(任)'자의 어원을 갑골문으로 보는 경우 뛰어난 기술자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으나, 갑골문자 해석과 관련된 오류일 확률이 높다. 중국 '상형자전(象形字典)'과 '한전(漢典)'에서는 '임'자의 원류가 '장인 공(工, 巨, 矩)[23]'과 '사람(亻)'의 합성어라고 주장하고 있다.[24] 즉, 고대 사회에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뛰어난 장인/기술자', 현대어로 공학자, 엔지니어(Engineer)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어떤 일이나 사무를 '맡다' 또는 '맡기다'라는 뜻이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갑골문을 원류로 보는 시각에서는 임(任)자에서 임(壬)자는 왕(王)자의 변형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그 논거는 임(任)자의 형태가 '임금 왕(王)'자를 포함한 이유는 금문(金文) 이후로부터 '사람 인(亻)'과 '장인 공(工)'자에, 장비를 쥔 모양 혹은 강조의 뜻을 나타내는 지사부호(指事符號, 一)가 추가된 형태로 합성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갑골문에서 '장인 공(工)'자는 아래 획이 '입 구(口)' 모양 또는 '비읍(ㅂ)' 모양을 띄고 있다. 즉, 갑골문에 '공(工)'자는 현대의 '장인 공(工)'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의 신빙성이 낮다.[25] 단적으로 장인 또는 기술자라는 뜻의 '장인 장(匠)'자는 갑골문에 이미 등장하는데, 그 모양이 임(任)자와는 확연하게 다르다.[26]
- 갑골 문자는 5천여자 발견되어 겨우 1천여자가 해석된 상형문자로 해석이 난해하다. 그 이유는 좌우의 구분이 없으며 합문(合文)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갑골문에 '임(任)'자의 어원이라고 주장하는 구문의 경우에도 '공(工)'자가 '사람(亻)'자 앞에 나오는 등 좌우가 바뀌어 있는 경우를 포함하고 있다.
- 근본적으로 상형문자(象形文字)를 구갑(龜甲, 거북등)에 새겨 기록한 갑골문에서 형성문자(形聲文字)인 '임'자의 원류를 찾는 것이 정확한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형성 문자는 뜻 글자와 소리 글자를 조합해 만든 문자로 이후 시대가 많이 흘러 육서를 통해 비로소 구분되고 체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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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석가부해동설(乘石舸浮海東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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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헌원계 성씨로는 희(姬), 유(酉), 기(祁), 기(己), 등(滕), 침/짐(葴), 임(任), 순(荀), 희(僖), 길(姞), 현(儇), 의(衣)가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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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자 명상 3 : 임금 왕(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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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를 흐르는 큰 물, 江(강)과 河(하)를 갑골문으로 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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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한자사전 - 음으로 찾기 "%C0%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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